박순용 (연세대학교 교육학부 교수)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 3월 12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COVID-19, 이하 코로나19)를 팬데믹(pandemic; 세계적 전염병)으로 공식선언한 가운데 이 가공할 바이러스의 확산속도와 범위는 지구촌의 일상을 전례 없는 광범위한 두려움 속에 멈추게 하였다.
가까운 과거에 경험했던 지카바이러스(2014)나 에볼라(2014-2016년)의 경우 그 전염성에 비해 중남미나 서아프리카 지역에 국한되어 팬데믹 선언까지 이어지지 않았던 사실에 비추어보면, 전지구적인 코로나19의 확산사태는 진정한 팬데믹의 성격을 띤, 완전히 다른 상황을 초래했다.
2020년 5월 현재 우리는 그야말로 실제적이고 현재진행형인 전지구적 위기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코로나19는 가까운 미래에 반복해 창궐할 수 있는 팬데믹 규모의 집단 감염병 사례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의학계의 경고이다. 팬데믹의 영향이 보건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등 모든 분야에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에, 지구공동체는 향후 사회·조직적 패러다임의 가속화된 변화가 요구되는 중대한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세계시민교육(Global Citizenship Education, GCED)과 관련하여, 현 팬데믹의 적시성은 여러 국가들이 국경을 굳게 잠그고 지역적 경향으로 회귀함에도 불구하고 세계시민교육이 왜 필요한지를 역설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언뜻 보면, 학교들이 개학을 연기하거나 강행한 경우에도 비대면 온라인 수업에 의존하는 지금 상황에서 세계시민교육을 거론하는 것은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 인류의 미래와 관련된 전지구적 문제들에 대응하는 교육적 실천에 대한 개념적 틀의 필요성이 공감되고 있는 가운데 세계시민교육이 등장했음을 상기해보면, 교육적 가치와 세계적 상황을 어떻게 연결 지을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시점은 ‘세계시민성(global citizenship)’이라는 용어가 내포하는 의미를 되새기면서 학교교육에 기반을 두고 세계시민성 함양을 목표로 삼는 세계시민교육의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적기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세계시민교육은 2012년 9월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글로벌교육우선구상(Global Education First Initiative; GEFI) 선언과 함께 제시된 세 가지 우선순위 중의 하나인 ’세계시민성의 함양’을 통해 국제사회의 주요 교육담론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2015년 9월 UN 지속가능발전 정상회의에서 선언된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와, 같은 해 11월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한 ‘유네스코 교육 2030’에서 연이어 세계시민교육이 핵심주제로 포함되면서 이와 관련된 국제적 공조와 실천적 의지가 확산되었다.
궁극적으로 유네스코에서는 세계시민교육을 국가별 교육정책에 반영하여 지구촌의 교육적 사명으로 이를 포용하게 함으로써 ‘지구촌 시대’에 걸맞은 보편적이고 범세계적인 교육패러다임을 창출해내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세계시민교육에 대한 정의와 역할을 관통하는 핵심 가치는 유네스코가 강조하고 있는 ‘더불어 사는 교육 (Learning to Live Together)’과 ‘모두에 대한 존중을 가르치는 교육 (Teaching Respect for All)’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세계시민교육은 “학습자들이 더 정의롭고, 평화롭고, 관용적이며 포용적이고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세계를 보장하는데 필요한 지식, 기술, 가치 그리고 태도를 교육이 어떻게 개발할 수 있는지를 요약하는 틀을 만들어가는 패러다임이다. 또한 교육이 지식과 인지적 기술을 개발하는 것을 넘어 학습자들에게 가치, 소프트 역량, 그리고 태도를 길러 국제 협력에 도움이 되고 사회변화를 이끌 수 있는 역할을 하게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시민교육은 앞서 언급된 국제 선언들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만도 이미 1997년 제7차 교육과정부터 사회과교육의 인간상으로서 ‘세계시민’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이와 더불어 세계시민교육에서 학습목표로 삼는 주요 주제와 내용들의 상당 부분은 기존의 학교교육 및 평생교육기관, 각종 NGO 또는 시민단체에 의해 평화교육, 다문화교육, 환경교육, 인권교육 등으로 이미 오랜 기간 동안 심도 있게 다루어져왔다.
이러한 점에서, 세계시민교육은 기존의 정보를 정형화된 형식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지구와 인류의 미래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다른 지역과 다양한 수준에서 여러 주체들이 경주해 온 분산된 노력들을 수렴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접근이 다양한 형태의 전지구적 위기에 더욱 효과적이고 잘 조율된 대응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즉, 세계시민교육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지금까지 파편화된 노력을 수렴하여 지구촌이 교육적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공통의 길을 모색하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학계와 시민사회에서는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세계시민’이라는 개념이 과연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이어져왔다. 세계시민성의 개념은 지역 및 국가 간의 공간적·인종적·사상적·언어적 경계의 초월을 전제하는 상상적 연대의식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흔히 인식된다. 그러나, ‘세계시민’이라는 용어가 내포하고 있는 모순 또한 자주 지적되어 왔다.
‘세계시민’의 개념은 ‘세계화’를 전제로 하는데 세계화는 보편성과 파편성을 동시에 현현(顯現)한다. 따라서, 이러한 개념 안에 내재된 모순은 이것이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세계화의 확산과 동시에 세계화에 대한 저항을 모두 포함한다는 불가피한 속성을 지니는 데서 비롯된다. 더욱이, 세계시민의 개념화와 관련해서 가장 자주 거론되는 문제는, 세계를 통치하는 실체로서의 정치 구조가 부재한 가운데, 개인들 사이의 ‘세계시민’이라는 정체성 형성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점이다.
이는 또한 국가주도의 학교교육에서 중요한 목적으로 다루는 국가적 시민의식의 함양이 탈국가적, 탈경계적인 맥락에서의 세계시민성을 어떻게 타협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하지만 ‘글로벌(세계)’라는 용어의 사용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국가’ 대 ‘세계’라는 대항쌍(binary opposition)에 기초한 방식으로 사고하도록 하고, 이는 세계시민의 개념에 대한 오해를 더욱 부추길 뿐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세계시민’이라는 용어의 정립을 위해, 탈(脫)경계적인 개념의 ‘세계’와, 경계 지워진 배타적 집단정체성을 기반으로 하는 ‘시민’의 모순적인 조합을 조정하여 이를 하나의 일관된 개념으로 정립시키는 작업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의 개념을 배타적인 소속감에 근거한 국가정체성의 차원에서 다룰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갖게 되는 의무감과 책무를 위주로 이를 다룰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시민정체성(civic identity)이 아닌 시민적 책무(civic duty)를 중심으로 ‘시민’의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세계시민’이라는 용어가 그다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주로 국가 단위로 거론되는 시민적 책무는 개인이 소속집단의 대의를 위해 자발적으로 헌신하고 의무를 다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점에서, 개인보다 집단, 나보다 타인을 먼저 배려하기 위한 일체의 행동코드가 시민적 책무로 집약될 수 있다.
시민적 책무를 세계시민이라는 더 넓은 개념에 적용하면, 전지구적인 문제에 공감하고 지구촌의 일원으로서 인류의 대의를 위해 의무를 다하는 개인을 상정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시민은 배타적 집단정체성에 머무르지 않고 지구촌이 처한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참여의식의 범위를 확장하고자 하는 개인들의 정신을 의미한다.
세계화는 21세기 들어 지역간 상호의존성과 상호연계성을 심화시켰으며, 일례로 글로벌 밸류체인(global value chain; GVC)의 작동원리를 들 수 있다. 이는 상품의 기획, 생산, 홍보, 판매에 이르는 가치사슬(value chain)의 모든 과정이 글로벌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공조방식이다. 그러나 이는 코로나사태와 같은 팬데믹 상황이나 국수주의로의 회귀로 인해 국경이 닫힌다면 한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위태로운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글로벌 가치사슬이 글로벌 주체들 간의 물질적 연계를 보여주는 데 반해, 세계시민성은 정신적 연계를 상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계시민성은 세계화의 산물이자 동시에 이에 대응하는 정신적 기제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서로 소통하는 방식이 곧 새로운 글로벌 패러다임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이므로,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는 우리에게 전례 없는 도전이 될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세계시민교육은 21세기 인류가 처한 상황에 대한 다원적인 이해와 비판적 성찰이 가능하도록 모든이를 포용하는 교육적 의무를 실천에 옮기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세계시민교육은 팬데믹 상황과 같이 국제적 공조가 절실한 환경에서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해주는 선택을 해야 할 때 어디에 우선순위를 둘지에 대해 중요한 교육적 함의를 제시할 수 있다. 이는 당면한 국가적·지역적 이해관계를 넘어 지구촌의 일원으로, 그리고 세계시민으로서, 책무의식을 발휘하는 시대적 소명의식을 세계시민성으로 풀어내는 것이 세계시민교육이 지향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세계시민교육은 우산개념(umbrella concept)으로서 그 안에 인류의 현주소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국가주의나 민족주의가 지배하는 현재의 교육적 토양의 한계에 대해 성찰하기 위한 다양한 교육적인 노력이 결집될 때 빛을 발할 수 있다. 여전히 국가주의적 사고 패러다임 속에 안주한 채 이러한 노력을 소홀히 한다면, 세계시민교육은 글로벌 공동선(共同善)의 추구라는 착시효과를 야기하는 교육 분야의 피상적인 선전도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결국 세계시민교육의 온전한 실행은, 당면한 전지구적 과제의 공동대응을 위한 지구공동체 의식을 고양하고 지속가능성과 정의로움에 입각한 공동번영을 구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교육의 청사진을 만들어 가는 데 있다. 세계시민교육은, 자문화중심적 논리에 기대는 폐쇄적 사고방식과 지역 이기심을 버리는 의식적인 선택을 주도하는 교육적 가치를 고양하므로, 우리의 기존 우선순위에 대해 재고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세계시민교육이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이상주의나 상상된 연대감을 그 구심점으로 삼기보다는 지구공동체가 우리 시대가 당면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세계시민성’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가치는 세계시민교육에서 지지하는 실천이 따를 때 비로소 의미있게 된다. 이러한 노력이 뒷받침될 때 인류는 앞으로 수십 년간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글로벌 위기의 파고를 극복할 수 있는 일말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필자는 현재 연세대학교 교육학부 교수이자, 한국국제이해교육학회 회장, International Journal of Multicultural Education 편집위원장,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국제이해교육원 이사를 맡고 있으며, 한국교육인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URL:
(No.2) 팬데믹 시대의 세계시민교육에 대한 성찰 > EIU 소식&인터뷰 - APCEIU (unescoapceiu.org)